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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만 부르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위트니스 리가 가르친다는 참소에 대해 란 캔거스가 1987년에 쓴 소책자. 이 소 책자에서 란 캔거스는 위트니스 리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가르쳤다는 것을 제시함.

  •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 사역을 믿는 것을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임
  •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임
  •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성경적인 길임

구원에 관한 진리

이 소책자는 1970년 대에 ‘크리스찬 리서치 인스티튜트’(CRI)의 비판들에 대한 답변으로 쓰여졌다. CRI는 그러한 비판들을 철회했고 자신들의 초기의 결론을 뒤짚었다(“지방교회들과 크리스찬 리서치 인스티튜트 간의 관계에 대한 간략한 역사” 를 보라). 이 소책자 내용은 역사적 기록을 위하고, 그들이 제시한 진리가 중요한 요점들을 담고 있고, 또한 CRI측의 비판이 철회되었음에도 여전히 다른 이들에 의해 그것들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 소게되고 있다.

목차

기독교 연구소(CRI)는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의 가르침들」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했다. 이 소책자가 많은 거짓된 비난을 담고 있고,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가 믿고 실행하는 것에 대한 왜곡된 그림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진실을 알 기회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은 기독교 연구소가 제기한 거짓된 비난을 반박하는 연속 출판물 중 하나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과 믿음에 대한 비난목차로 돌아가기

기독교 연구소 저자들의 거짓된 비난에 의하면, 위트니스 리는 『구원은 단순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문제일 뿐이다(9쪽).』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구원이 개인의 신앙과 관계된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가 말하는 대로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우리를 비난했다. 기독교 연구소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람이 「오 주여, 오 주여, 오 주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일체 필요 없다.』고 말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소위 「연구」의 결론은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믿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난은 「흐름」지(誌)기사 중 한 단락에 근거한 것이다(1970년 2월, 6쪽).

『우리는 불신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설교가 필요치 않음을 보았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도와서 「오 주여」라고 세 번만 말하게 한다면, 그들은 구원받을 것이다. 창문을 열면 공기가 들어갈 것이다. 그들이 할 일은 다만 입을 열어서 「오 주 예수여,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으려는 의도가 없을지라도 그들은 사로잡힐 것이다! 그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창문을 열기만 하면 공기는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접촉하는 문제이다.』

기독교 연구소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고립된 발췌문은 구원에 관한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의 가르침이, 사람이 어떤 것도 믿지 않고서도 단지 「오 주여」라는 말만 하면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더 나아가 그들은 『성경에 따르면 믿음과 관계 없이 「오 주여, 오 주여, 오 주여」라고 말하는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은 참된 것이 아니다.』(10쪽)라고 따진다. 기독교 연구소 저자들이 위트니스 리의 글의 본문에서 발췌한 고립된 부분을 비난의 근거로 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이 주제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다른 많은 관련 저술들을 무시한다.

타는 불과 흐르는 물목차로 돌아가기

위에서 인용한 문구를 생각해 보자.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저자의 목표와 의도에 따라 그 글을 이해하기 위해 그 문구가 발췌된 글의 전체 내용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글은 「타는 불과 흐르는 물」이라는 제목의 메시지로서, 「지방 교회들을 위한 일곱 영」이라는 일련의 메시지 중 다섯번째 것이다. 앞의 네 메시지는 「강화된 영」,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회복」, 「계시록 안에 있는 네 가지 이상」, 「지방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을 다룬다. 「타는 불과 흐르는 물」이라는 메시지에서 위트니스 리는 계시록에서는 보좌가 여러 번 언급되었는데, 계시록 4장 5절, 『보좌 앞에 타오르는 일곱 등불이 있으니』, 22장 1절,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 메시지에서 중점은 불과 물을 체험하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영은 타는 불과 흐르는 물, 둘 다이다.』(3쪽)라고 지적한다. 그는 계시록에 올 때 교리를 만나지 않고 불과 물이 있는 보좌를 만난다고 말한다. 『불은 우리를 태우고, 물은 우리를 공급한다. 한 면에서 우리는 태워져야 하며, 다른 면에서 우리는 공급받고 적셔져야 한다』(3쪽). 그는 또한 우리가 태워지고 적셔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보좌를 접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서 「오 주여, 오 주여, 오 주여」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일곱 영이 우리 안에서 불타고 흐를 것이다.』(6쪽)라고 한다. 이 글은 다음 문장으로 결론을 맺는다. 『주님이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 가운데서 자유로운 길을 가지실 수 있도록 참되게 태워지고 적셔지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그 영께 열어 드리자』(6쪽). 즉 이 메시지에서 위트니스 리의 의도는 구원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는 불이시고 흐르는 물이신 그 영을 체험해야 한다는 긴급한 필요를 강조하는 것이다.

살아 계신 성령을 접촉함으로 구원받은 한 젊은이를 예로 든 후, 위트니스 리는 불이시고 물이신 그 영에 대한 체험을 불신자를 주님께 인도하는 것에 적용하였다. 이것이 그가 『불신자를 구원하기 위해 설교할 필요가 없다. 이는 그들이 다만 주님을 향하여 자신을 열고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하나님의 일곱 영을 접촉하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부분이다. 만일 그들이 그들 존재의 「창문」을 연다면, 그 영의 「공기」가 들어갈 것이다. 이러한 예시와 적용의 목적은 구원에 관한 우리의 신앙을 철저하게 다루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필요는 다만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불타고 흐르는 영을 생생하게 접촉하는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믿음의 중요성목차로 돌아가기

위트니스 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그것은 기독교 연구소 저술가들이 이끌어 낸 부당한 결론이다. 우리가 보겠지만, 위트니스 리는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 역사를 믿는 것은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임을 대단히 강조하여 말한다. 여기에서 그는 단지 「사람들이 믿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아도」 주님께 사로잡힐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확실히 그러한 말은 합리적으로 부인될 수 없다. 다소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을 때, 그에게 주님을 믿으려는 의도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비록 그에게 주님을 믿으려는 의도가 없었지만, 그는 주님과 접촉하였고, 자연스럽게 주님의 이름을 불렀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통하여 그분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주님의 주권적인 긍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불신자들이 그분을 믿으려 하거나 그렇게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인도되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접촉함으로써 그들은 그분 안으로 믿었고 믿음 안에서 그분과 연합되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는 얼마나 멀리까지 이르는지!

기독교 연구소 저자들은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성경이 구원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고 여기는 잘못을 범하였다. 물론 그들에게는 이렇게 추측할 근거가 없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것에 대해 말하는 구절들을 매우 잘 알고 있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기탄없이 가르친다. 사람이 구원받고, 거듭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함을 우리는 강하게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어느 모로나 다른 어떤 그리스도인 못지 않게 강하다. 그러한 자료들이 수년 동안 공개적으로 활용 가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이유로 기독교 연구소 연구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믿음의 중요성에 관하여 쓴 것들을 무시하고 있다. 다음은 요한복음 생명 수업 메시지 9에서 발췌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정죄로부터 구원받을 필요성에 관하여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우리가 거듭나는 길은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가 거듭날 수 있는가? 주님은 15, 16, 18, 36절에서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반복해서 하신 이 강한 말씀들은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나는 길이 단순히 주님을 믿는 것임을 분명하고도 명쾌하게 말씀하신다. 구원받고 거듭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다. 이것은 절대로 믿음의 문제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혹은 우리의 일이 얼마나 좋은지와는 상관 없이,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거나 거듭날 수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믿음만이 중요하다. 구원과 거듭남은 믿음에 의한 것임에 틀림없다. 주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소극적인 면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정죄에서 해방된다. 또한 적극적으로 거듭나기 위해 우리가 영생, 즉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얻는 것도 주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주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구속 역사를 이루셨다. 십자가상의 구속하는 죽음으로 그분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셨으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모든 의와 거룩과 영광의 요구를 이루셨다. … 우리는 주님께서 성취하신 것을 「믿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 … 우리는 일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그분이 마치시고 완성하신 만유를 포함한 구속 역사를 「믿어야」 한다. …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그분의 아들들로 태어나는 것은 주님과 그분의 만유를 포함한 구속 역사를 「믿음으로써」이다.』

이것이 주님을 믿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분명한 진술이 아닌가? 동일한 메시지에서 위트니스 리는 계속하여 주님을 영접하는 것과 그분을 믿는 것에 대해 말한다.

『주님을 「믿는」 것은 그분을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요 1:12). 주님은 영접할 수 있는 분이시다. 지금 그분은 생명 주는 영이시며, 완전한 구속을 가지고서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기를 기다리며 기대하고 계신다. 우리 영은 영접하는 기관이다.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 영 안에 주님의 영을 영접할 수 있다. 일단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그 영이신 주님은 우리 영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럴 때 우리는 생명 주는 영이신 그분에 의해 거듭나며 그분과 한 영이 된다(고전 6:17). 16, 18, 36절에 있는 「―을(를)믿는」이라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안으로 믿는」이다.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분 안으로 「믿는다」.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분 안으로 들어가서 그분과 하나 되며, 그분께 참여하며,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신 모든 것을 함께 나눈다. 그분 안으로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모든 어떠하심과 그분이 통과하시고, 완성하시고, 얻으시고, 획득하신 것에서 그분과 동일시된다. 그분 안으로 「믿음으로써」 그분과 하나 될 때, 우리는 생명이신 그분에 의해 구원받고 거듭난다. 우리가 생명이신 그분께 참여하고 그분 안에서 거듭나는 것은 그분 안으로 「믿음으로써」이다.』

위트니스 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성이 있음을 가르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록 우리가 죄인들을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접촉 안으로 인도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을 강조하더라도,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속 역사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편견 없는 생각을 가진 독자가 기독교 연구소의 소책자와 이 반박문을 모두 읽었다면, 틀림없이 우리 글들이 전체적으로 객관적이고 편견없이(연구자들이 하고자 했던 것처럼)여겨질 것이며, 우리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주님을 믿어야 하고 또 기도하거나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주님을 접촉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위하여 믿음이 필요 없다고 가르친다는 비난은 거짓이다.

우리가 구원에 관해 믿고 가르치는 것목차로 돌아가기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믿고 가르친다. 우리의 신앙과 가르침은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한다. 우리 구원의 기초는 사람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이다(엡 2:8, 딤후 1:9, 딛 3:5, 행 15:11). 우리 구원의 기초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다. 그 누구도 아닌 그분 자신이 구주이시다(행 13:23, 눅 2:11). 사실 예수는 「구원자 여호와」를 의미한다. 마태복음 1장 21절은,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선포한다.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 주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라고 말한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따르면,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우리는 오직 주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임하셨고』(딤전 1:15),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고자 하시기 때문에』(눅 19:10)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받는 길은 믿음에 의한 것이다(엡 2:8). 누가복음 7장 50절에서 주 예수님은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고 머리카락으로 닦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로마서 1장 16절에 있는 바울의 말에 의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네 집이)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말했다. 주 예수님을 믿는 것에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행 2:21, 롬 10:13)과 자백하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결과는 우리가 죄 사함 받는 것이고(마 1:21),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받는 것이며(갈 3:13), 장래의 노하심에서 건짐 받는 것이고(살전 1:10),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이며(골 1:13),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받는 것이다(갈 1:4). 하나님의 구원의 결과로서 우리는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요한 일서 5장 13절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우리는 우리가 영생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요한 일서 3장 14절은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것을 안다고 했다. 요한 일서 5장 19절은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을 안다고 했다. 로마서 8장 16절에 따르면, 그 영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친히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았고,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달콤한 내적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안전과 우리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하다.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뜻(엡 1:5)과 창세 전에 이루어진 그분의 선택(엡 1:4)과 후회하심이 없는(롬 11:29)그분의 부르심(롬 9:11)에 의해 보장된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요일 4:10)과 하나님의 은혜(딤후 1:9)에 의해 보장된다.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8-39).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은 그분의 의(롬 1:16-17)와 그분의 언약(히 8:8-13, 시 89:34)과 그분의 능력(요 10:29, 시 89:13)과 변치 않는 하나님 자신(약 1:17)에 의해 보장된다. 구원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속(히 9:12)과 그리스도의 능력(요 10:28-29)과 그리스도의 약속(요 6:37)에 의해서도 보장된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그분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놀라운 구원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자!

주님의 이름을 부름목차로 돌아가기

기독교 연구소 소책자가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해 주는 신약의 구절들을 참고로 하지 않는 것은 다소 이상하다. 그렇다. 우리는 확실히 불신자들을 격려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분을 접촉하게 한다. 사도행전 2장 21절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바로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그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졌고(행 2:17), 그 영은 죄인들이 거듭날 수 있도록 기회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님을 부름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다소의 사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결박하기 위해 열심히 찾았다(행 9:14).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자연스럽게 『주여, 뉘시오니까』(행 9:5)라고 말했다. 나중에 아나니아의 인도 아래 사울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침례를 받았다(행 22:16). 로마서에서 바울은 주님이 그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부요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롬 10:12-13).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부르짖음목차로 돌아가기

워치만니는 사람이 주님을 접촉하고 구원받기 위하여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주여 이 사람은(What Shall This Man Do?)」에서 그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의 말에 의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행 2:17, 21)라는 다른 약속(같은 선지서에서 베드로가 인용한)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셨기 때문에, 부르짖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해서 로마서 10장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령은 빛과 같다. 조금만 창문을 열으라. 그러면 그것은 안으로 흘러들어와 비출 것이다. 다만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라. 그러면 「그 순간에」 그 영이 들어와서 책망과 회개와 믿음―새로운 출생의 기적―의 변화시키는 역사를 시작하실 것이다.』

구원은 가장 좋은 방법이나 사물이 아닌 한 인격―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사야 12장 2절 말씀은,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고 말한다. 다윗은 이렇게 선포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심이라』(시 27:1). 시편 62편 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라고 말한다. 구원이 우리에게 생명과 모든 것 되시는 한 인격이신 삼일 하나님 자신이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생생하게 개인적으로 접촉함으로써 이러한 구원을 체험한다. 시므온은 그의 팔에 안긴 아기 예수를 바라보면서,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30)라고 외쳤다. 시므온은 이것이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눅 2:26)는 약속의 성취임을 알았다. 주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이다. 구원이 놀라운 한 인격이시고 우리와 이 인격간의 생생한 접촉을 포함하기 때문에, 주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눅 19:9)라고 말씀하셨다. 삭개오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통하여 어떤 영원한 특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한 놀라운 인격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워치만니는 복음 전파의 첫번째 목적이 사람들을 주님 자신께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함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주여 이 사람은」이라는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점적인 질문은 우리가 아들을 소유했는가, 그렇지 않는가이다. 우리가 구원의 전체적인 계획을 이해하는가의 여부는 우선이 아니다. 구원의 첫째 조건은 지식이 아닌 「그리스도를 만남」이다』. 같은 장의 「사람을 사로잡음」이라는 제목에서 그는 계속, 『나는 「초기」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것임을 보았다』고 말한다. 워치만니는 사람의 가장 큰 「필요는 주 예수님 자신을 보는 것이고, 그분을 만나는 것이고, 그분을 접촉하는 것임」을 지적했다(43쪽). 그는 말하기를, 『구원의 시초는 지식의 문제가 아닌 「접촉」의 문제이다. 주님을 접촉한 사람은 누구나 생명을 영접한다』고 했다. 워치만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 그들에게 어떤 요점을 확신시키는 것이 우선이 아님을 배웠다. 맨 먼저 할 일은 그들이 주님을 직접 접촉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구원은 「요점들」의 문제가 아니다! 구원은 심지어 이해나 의지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문제―사람이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직접 접촉하도록 이끌리는 문제―이다』.

수년 동안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체험을 연구함으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초기에 필요한 것은 체계적인 가르침을 믿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구속을 성취하신 모든 사실을 확신하는 것도 아니며,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직접적이고도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라는 워치만니의 간증을 확증한다. 그분은 구주이시고, 심지어 우리의 구원 자체이시다. 사람들이 그분을 접촉하고 그분 안으로 믿을 때, 그들은 반드시 구원된다. 이것이 구원의 길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요, 가르침이요, 간증이요, 실행이다.

론 캔거스(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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